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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그 두 번째 시간에는 영화 명량의 실제 모티브이면서

전 세계적으로 대한민국 국격의 위상을 높여주신 이순신 장군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아볼까합니다.

 

워낙 방송이나 주위에서 자주 거론되는 우리나라 위인이다 보니

대략적으로 이순신 장군에 대해서 아시는 분들이 많이 계실 거라고

혹시나 아직 이순신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부족하신 분들은

이 글을 보시고 조금이나마 공부를 해보시길 바라면서 지금부터

이순신 장군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순신은 1545년 초기 변 씨의 슬하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납니다.

태어날 당시 양반의 신분으로 출생을 하게 되지만 추후에 양반에서

평민으로 신분이 강등되게 됩니다.

 

이순신은 다른 아이들과 모여 놀 때는 항상 나무를 깎아서

화살을 만들고 전쟁놀이는 즐겨했으며 항상 대장놀이를

하며 유년시절을 보냈습니다.

 

이후 우리의 예상과 달리 무과가 아닌 문과를 공부하며 문과에서도

뛰어난 소질을 보여줬지만 결혼 이후 장인어른의 영향을 받아

남들에 비해 늦은 나이에 무과시험을 공부하게 됩니다.

 

주위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무과시험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던

이순신은 여러 번의 낙방을 경험했지만 이후 당당하게 32세 나이로

무과 급제를 하게 됩니다. 그렇게 그는 생의 첫 관직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관직생활을 하면서 위대한 업적을 여러 가지

쌓으면서 현재까지도 회자되고 있는 23전 23승이라는

어마어마한 역사를 남기며 후대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그럼 과연 이순신 장군의 업적은 대표적으로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43세 관직생활을 이어나가던 중 녹둔도라는 북쪽 지역을 관리하는

직책을 맡고 있던 때 이순신에게 첫 고난이 찾아오게 됩니다.

이 지역은 북방 여진족의 약탈과 침략이 잦은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병력 배치가 적었던 것이 이순신은 마음에 들지 않았고 직속상관인

이일에게 추가 병력 요청을 했지만 매번 거절당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던 중 이순신은 추수를 위해서 군대를 이끌고 이동하던 도중에

여진족에게 습격을 받고 11명 사망 160명이 포로로 잡혀가게 됩니다.

이 일에 대한 책임이 있는 이순신의 직속상관인 이 일은 본인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 이순신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게 됩니다.

 

하지만 당시 왕인 선조는 사형은 과한 처사라고 판단하여 이순신을

백의종군을 지시하게 됩니다.

 

*백의종군 - 흰옷을 입고 군대에 복무하는 것, 즉 말단 군인

 

이후 녹진도 기습을 복수하기 위해서 2차 녹둔도 전투가 벌어지게

되는데 이때 이순신은 여진족의 우두머리를 사살도 아닌 생포를

하게 되며 큰 업적을 인정받게 되며 다시 관직으로 복귀를 하게 됩니다.

 

이후 이순신은 47세 나이로 전라도 지역의 해군을 총괄 지휘하는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라는 자리에 오르게 되면서 우리가 이순 신하면

떠오르게 되는 거북선이 1592년 4월 12일에 거북선을 완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루 뒤인 임진왜란이 발발하게 되는데 이순신 장군의

첫 해전은 1592년 5월 4일 옥포해전으로 단 한 명의 전사자 없이

상대 26척의 배를 격침하게 됩니다.

 

그렇게 장기화된 임진왜란에서 가장 중요한 물자 보급로를

이순신 장군이 철저하게 막아내면서 왜구들의 물자 보급을

원활하게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한 왜구들이 보급로 확보를 하기 위해

계획을 짜는 도중 이순신 장군의 지략이 다시 한번 이 전투에서

발휘되게 됩니다.

 

그 전투는 바로 한산도 대첩으로 한산도 앞바다는 거제도와

통영 사이 있는 곳으로 사방이 막혀 도망갈 길이 없기 때문에

적은 병력으로도 전투가 가능하다 판단하여 조선의 함대 6척을

왜구들이 있는 곳으로 보내 유인을 하게 됩니다.

 

이에 왜구는 망설임 없이 조선 함대를 쫓기 시작했고

한산도 앞바다에 도착하자마자 그곳에 대기하고 있던 조선

함대들은 마치 학이 날개를 펼치듯 일본 함대를 둘러싸게 됩니다.

이게 바로 그 유명한 "학익진"으로 현재까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회자되고 있는 전투일 정도로 명성이 자자한

이순신 장군의 업적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군은 둘러싸인 왜구를 피해를 거의 입지 않고 몰살시키게 됩니다.

이후 이순신 장군의 무서움을 느낀 일본군은 더 이상 해전을

금지하게 되는데 이때 이순신 장군은 선공을 펼치기 위해서

부산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렇게 부산 앞바다 도착한 이순신을 본 왜구들은 겁에 질려

도망가기 시작했고 왜구의 배 100척을 흔적도 없이 전멸시키게 됩니다.

부산에서 마저 패배한 왜구는 물자보급로가 완전하게 끊기게 되고

조선은 전라도를 지켜내는 게 성공합니다.

 

당시 공을 인정받은 이순신은 마침내 해군참모총장 자리에 오르게 되지만

각종 음모와 선조의 미움을 사게 되면서 해군참모총장 자리를 오랜 기간

지키지 못하고 온갖 음해로 인해 옥에 갇히게 됩니다.

 

이후 선조는 이순신에게 권율 장군 밑에서 백의종군을 명령하게 되고

이순신 후임으로 자리에 앉은 원균은 칠천량 해전에서 전멸하게 되며

다시 한번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하게 됩니다.

 

다행히도 이순신의 부하였던 칠천량 전투에서 미리 빼놓은 배 12척이

남아있었지만 선조는 12척으로는 남은 전투에서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여 이순신 장군에게 후퇴를 명령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순신은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습니다."라고

말하며 병사들을 모아 "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라며

병사들의 사기를 다졌습니다.

 

그렇게 12척의 배로 전투를 나가게 된 이순신은 100척 이상의

왜구 함대를 상대해야 했고 쌘 물살을 이용하여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고자 했습니다.

 

이 전투에서도 이순신은 왜구를 격침시키며 다시 한번 해상권을

손에 가지게 되며 그해 임진왜란의 주동자인 도요토미가 사망하게 되고

왜군은 철수를 하게 됩니다.

 

그렇게 마지막까지 1598년 11월 19일 또다시 침략할 수 있는

왜구들을 모두 쓸어버리기 위해서 명나라의 병력과 함께 노량해전이

시작되게 되는데 이순신은 당시 일본군의 총탄을 맞고 쓰러지게 됩니다.

 

당시 이순신은 싸움이 급하기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말하며

오로지 전투의 승리만을 생각했고 노량 전투에서도 승리를 거두며

전설적인 23전 23승이라는 7년간의 기록을 막을 내리게 됩니다.

비록 왕의 믿음을 받지 못하고 각종 음해로 인해서 역경이 있었지만

백성과 조선을 위해서 목숨 바쳐 싸운 충무공 이순신 우리는 이런

위인들의 역사를 다시 한번 되새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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