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우리가 바쁜 일상을 살아가다 보면 역사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지 못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물론 기본 교육 과정에서 배우는 역사 지식이 있지만

수능에 최적화 된 교육은 우리가 역사에 대해서

깊게 공부하기 어려운 조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을 따로 내서 역사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명언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안중근 의사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1879년 9월 2일생으로 1910년 3월 26일

이른 나이에 순국하시게 됩니다.

 

안중근 의사는 태어날때 등에 점이 7개가 있어 북두칠성의

기운으로 태어났다는 뜻으로 "응칠"이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이 호칭은 해외에서 활동할 당시 주로 사용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집안은 천주교 성당 건축에 참여할정도로

천주교 신앙심이 높았으며 그 영향을 받아 안중근 의사도

1895년 천주교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을 배우게 됩니다.

당시 프랑스 출신의 신부였던 조제프 빌렐렘(홍석구)으로부터

토마스라는 세례명을 받게 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홍석구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면서 이후 만인계의 채표회사를 설립하고

그 회사에 사장 자리를 맡게 됩니다.

 

*만인계 - 1,000명 이상의 계원을 모아서 돈을 출차한 뒤

추천이나 입찰로 돈을 융통해주는 모임

*채표회사 - 만인계의 돈을 관리하고 추첨하는 회사

 

평소 말타기와 활쏘기를 즐기다보니 사냥하기를 즐기고

명사수로 이미 정평이 나있는 상태로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에 눈이 떴으며 당시 안중근의 아버지인

안태훈은 자발적으로 군대를 설립하여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고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일본에게 외교권을 뺏겼다는

소식을 듣고 국권회복운동을 하기 위해서 상하이로 갔으나

지역에 있던 유력자들과 천주교 신부들로 부터 협조를 거절당하고

실망감을 앉고 되돌아오게됩니다.

 

그 무렵 부친상을 당하고 1906년 3월 평안남도 진남포로

이사하고 생계를 위해서 석탄상회를 경영하기도 했으나

석탄사업은 성공하지 못하고 석탄회사를 정리하고 모든 재산을

털어서 삼흥학교를 설립하고 교육운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교육에 힘을 쓰던 중 1907년에 연해주로 건너가 의병활동에

직접적인 활동을 하게 됩니다. 이듬해 1908년 7월 전제덕의

지휘하에 대한의군참모중장 겸 특파독립대장 및 아령지구

사령관의 자격으로 엄인섭과 함께 100명의 부하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경흥군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비대를

기습공격하여 전멸시키는게 성공합니다.

 

이후에도 여러차례 기습에 성공하면서 공을 세우지만

얼마 뒤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완패를하게됩니다.

의병대원들 증언에 따르면 의병대원들 반대에도 불구하고

안중근 의사 개인의 뜻으로 전투에서 잡은 일본군 포로를

국제공법에 의거해서 석방해주었기 때문이라고 얘기했습니다.

 

그걸 계기로 대원들의 신임을 잃은 안중근은 부대를 해체하고

1909년대 초 뜻이 같은 동지 11인과 함께 동의단지회를 결성하고

의병활동을 하기 위해서 노력하였습니다.

 

이때 우리가 흔히 알고있는 왼쪽 손의 약속가락 한마디를

끊어 결의를 다지게됩니다. 그렇게 동의단지회는 의병활동을

위해서 계획을 세우고 이들 12명은 위태로워진 조국을 구하기

위해서 헌신하기를 결심합니다.

 

그러던 중 1909년 9월 이토히로부미가 러시아의 재무대신과

만나기 위해서 만주를 방문하기로 한 사실을 입수하게됩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당시 한국의 초대 통감 자리에 오른 인물로써

한국 병탄의 길을 연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이때부터

이토를 암살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마침 1909년 10월 26일 거사의 날이 밝고 오전 9시

이토 히로부미가 탄 열차가 하얼빈역에 도착하게되고

이토는 러시아 재무대신과 열차 안에서 회담을 진행한 뒤

밖으로 나와 역에 도열한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고 다시

귀빈 열차쪽으로 발길을 옮기게되는데 그때 바로 의장대

후방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던 안중근 의사는 앞으로 뛰어나가며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총탄을 발사하게됩니다.

이토는 안중근 의사의 총탄을 맞고 쓰러졌고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연행되는 순간에도 "코레아 우라(대한만세)"를

외치며 끝까지 조국에 대한 마음을 들어내고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게됩니다.

 

그렇게 체포된 안중근 의사는 일본 감옥으로 이송되어서

여러번 재판을 받게 되고 1910년 2월 7일부터 14일까지 6번에

걸친 재판을 받게되고 결국 2월 14일 공판에서 사형선고

받게 됩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2월 14일 발렌타인데이는 우리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힘쓴 안중근 의사의 사형선고일 이라는 점

꼭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사형을 앞둔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인 조마리아 여사는

안중근 의사에게 마지막 당부를 남기게 되는데 이는 현재까지

거론되면서 굳건한 어머니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게 목숨을 구걸하는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다른 마음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가슴이 뜨거워지는 조마리아 여사의 마지막 당부입니다.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하라는 어머니의 말씀대로 공소를

진행하기 않았고 옥중에서 동양평화론과 안응칠역사를 저술하며

의연하게 최후를 맞이게 됩니다.

 

안중근 의사는 후세에 거사의 진정한 이유를 전하기 위해

동양평화론 집필에 심혈을 지울였고 이를 끝날때 까지만이라도

사형 일자를 연기해줄것을 일제에 요구했으나 일제는 이 요구를

무시하고 1910년 3월 26일 사형집행을 가행하게됩니다.

 

그렇게 안중근 의사는 여순감옥에서 1910년 3월 26일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치고 순국하게됩니다.

순국직전 안중근 의사는 아우들에게 유언을 전했습니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우리나라의 국권회복을 위하여

힘쓸것이고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여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공을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것이다."

- 안중근 의사의 순국전 마지막 유언-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재까지 안중근 의사의 뼈는 발견하지

못하고 앞으로도 발견하기는 어려울것으로 판단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서 일평생 한몸을 바친

안중근 의사에 대해서 알아봤습니다. 글로 표현하기엔

너무나도 많은 공을 세운 안중근 의사에 대해서 아주 잘

교육을 하고 있는 설민석 선생님의 강의 영상 한개를 공유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독립을 위한 숭고한 희생 도마 안중근(설민석) - 약 13분▼

▼안중근 의사 순국 106주년 특별기획 다큐멘터리 - 약 55분▼

시간내서 꼭 한번씩 시청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반응형
댓글